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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삐 애미의 역사 공부/국사공부

유관순 열사와 진정한 3.1운동의 의의

by 하삐 애미 2020. 10. 10.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3.1 운동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있죠? 3.1 운동에 참여한 후 체포되어 꽃다운 나이에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유관순 열사입니다. 

1902년에 태어난 유관순은 1916년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사촌 언니와 함께 학교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유관순이 이화학당 고등과 1학년이 된 1919년에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3.1 운동이 시작됐고, 이 여파로 인해 1919년 3월 10일 전 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졌습니다. 그 후 사촌 언니와 함께 천안으로 내려와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에 참여했으며, 유관순의 형제와 부모님들도 운동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만세 운동을 하면서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유관순 역시 체포되면서 공주 지방법원에서 5년을 구형받았습니다. 이후 항소하여 3년 형으로 줄었고, 이후에 일본 여왕 결혼 기념 특사로 1년 6개월로 감형됐습니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후 옥중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옥중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해 1920년 9월 28일 옥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화여대 교장 룰루 프라이가 유관순의 시신을 인도받고 장례를 치러 주었다고 합니다.

 1919년 1월 당시 고종황제가 사망하였는데요. 이완용이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또한 고종 황제라는 무게감이 있기 때문에 반일 감정이 더욱 격양되고 있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오래전부터 이미 천도교에서는 오래전부터 동학농민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전국민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천도교는 처음에는 구 대한제국의 정치인들과의 연대를 모색했었지만 이들이 소극적인 태도로 나오자 개신교, 불교와의 연대로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최남선이 초안을 잡고 독립 선언문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독립 선언문은 1919년 2월 20일부터 인쇄를 시작 총 3만 5천 여부를 인쇄했습니다.

 한편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 민족대표 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 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거사 하루 전이었던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이 마지막으로 회의를 했고, 이 자리에서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 같다고 자체적으로 판단, 계획을 바꿔 술집인 태화관으로 장소를 옮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탑골공원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이 이를 알아채 항의를 했지만 요지부동이었고, 학생들은 독립선언서를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생들이 간 후 민족대표는 태화관에서 독립선언문을 눈으로만 읽었고, 종료 경찰서에 선언문을 보내 자신들의 위치를 알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 경찰에게 모두 연행됐다고 합니다. 물론 피해를 줄이려고 하는 의도를 이해하고, 자신들의 뜻을 직접 자수하면서 보여주려고 했다는 데 의의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가 알고 있던 3.1 운동의 시작이 참 초라하네요. 학생들이 미리 알지 못했다면 이런 전국적인 운동이 될 수 있었을까요?

 민족 대표한테 독립 선언서를 받은 학생들은 결국 독자적으로 움직였고, 경신학교 학생 정재용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고종의 국장을 보기 위해 상경했던 사람들까지 가세하여 수십만의 인파가 모였고, 열기가 고조되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평양, 의주, 선천군, 원산 등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음날에는 이북 전역과 전국으로 확대됐고, 전국 각지에서 제암리 학살사건과 같은 학살 사태가 속출하게 됩니다.

3.1 운동에 대한 이미지는 백색의 옷을 입고 태극기를 흔드는 이미지이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천이나 모자, 그리고 독립기를 흔들었다고 합니다. 독립기는 흰 천에 독립만세 등의 글을 붓으로 써놓은 기였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태극기와 함께 쓰였다고 합니다. 

 사실 3.1 운동에 참여해서 아까운 목숨을 잃으신 분들은 유관순 열사 외에도 정말 많습니다. 참여 인원은 대략 200만 명 이상이었고, 이 중 7,500여 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는데요. 약 2달 동안의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7,500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정말 마음이 아프고, 당시 상황이 얼마나 격하고, 잔인했을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3.1 운동이 바로 독립으로 이루어지지는 못 했지만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한줄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자신들의 목숨까지 바쳤던 수많은 3.1 운동의 참석자들이 참 대단하고,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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