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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삐 애미의 역사 공부/세계사 공부

아편전쟁의 배경과 의의, 중국 몰락의 시작 -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의 신호탄이 된 전쟁

by 하삐 애미 2020. 11. 8.

아편전쟁의 배경과 의의,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의 신호탄이 된 전쟁아편전쟁의 배경과 의의, 중국 몰락의 시작 -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고 서구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의 신호탄이 된 전쟁

1. 아편전쟁

 대영제국과 청나라 간에 일어난 전쟁으로 1840년, 1856년 두 차례 일어난 전쟁이다. 당시 대영제국이 청나라와의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중국에 대량으로 아편을 수출하였고, 이를 계기로 영국과 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일어나게 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 이후 홍콩과 구룡반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됐으며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침탈의 신호탄이 된 전쟁이기도 하다. 서양 열강들이 청나라를 미지의 나라이자 동양의 잠자는 사자로 생각하면서 무서워하고 있었으나 아편전쟁 이후로 청나라는 서양 열강에게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게 된다.

 청나라는 이 전쟁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일부 병력에게 참패했고, 이는 조선에게도 큰 위기감을 가져다 줬다. 당시 청이라는 대국 뒤에서 아무런 대비도 없었을뿐더러 정치적으로 썩을 대로 썩어있었던 터라 서양인들에게 멸망할 거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2. 아편전쟁의 배경

 명나라 때부터 유럽 상인들은 광저우에서 주로 무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청나라 견룽제 시절 광저우 외의 무역항에서의 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하는 등 무역에 제한이 많았고, 청나라는 무역항을 확대하려던 유럽권과의 무역 갈등을 빚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19세기까지 수차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 청나라의 문호를 개방하려고 가즌 애를 썼지만 청나라의 미온적인 태도로 매번 불발됐고, 영국은 군사력을 이용해야 청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이후 중국이 전 세계에 공장으로 불리며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것처럼 18세기 후반 청나라는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수공업이 엄청나게 발달하여 엄청난 무역 흑자를 기록했었다. 당시 인도를 정복하기 위해 막대한 부채를 졌던 동인도 회사는 영국의 자본과 인도의 면화와 청의 은을 이용한 삼각무역으로 돌파하려고 하였지만 청은 19세기에는 더 이상 인도의 면화가 필요하지 않게 되면서 동인도 회사는 재정적으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게다가 중국의 차까지 유럽 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되자 청나라와의 무역 불균형은 갈수로 심해지게 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동인도 회사가 생각한 것이 인도 벵골에서 생산하는 아편이었다.

 아편이 청나라에 수입되자 오랫동안 평화를 누려 분위기가 해이했던 청나라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아편은 빠르게 청나라 백성들에게 침투했고, 국가적 문제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일반 백성뿐 아니라 관료들도 아편을 흡연하고 있어 나라 기강이 해이해지고, 심지어 당시 황제였던 도광 제도 아편에 중독됐었다고 하니 나라가 얼마나 피폐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아편 수입으로 막대한 은이 유출되면서 국가의 재정난이 생기는 등 문제가 막심해지자 도광제는 이에 대한 대책을 고심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임칙서라는 청나라 최후의 명신인데, 임칙서는 엄금론을 내세워 아편을 강력히 단속하고 있었고, 이에 대한 세세한 정책까지 이미 준비해 적극적으로 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 황제의 명으로 1839년 광저우에 내려간 임칙서는 아편에 관해서는 영국과 타협을 전혀 하지 않았으나 아편을 제외한 모든 교역은 허할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이 광저우에서 무고한 중국인을 살해하고 청의 법을 무시하며 범죄자를 인도하지 않으려고 하고, 영국 상선을 보호하기로 왔던 영국 해군 소장 엘리엇이 영국 상선을 포격하는 등 횡포를 부리자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이후 몇 차례 무역 재개 협상이 불발되면서 청은 영국과 단교를 결정하게 된다. 

3. 1차 아편 전쟁의 시작과 결과

 영국 상인들의 로비가 영국 의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는 분위기 속에서 영국이 중국에서 무역 갈등으로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은 결국 아편전쟁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국회 표결로 이어졌고, 간발의 표 차로 전쟁 찬성 쪽으로 결론이 나게 된다.

 물론 중국과의 전쟁에 대한 눈에 보이는 명분이 아편이라는 점에 있어서 전쟁 반대의 목소리 역시 작지 않았지만 전쟁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엘리엇이 이끄는 원정군은 임칙서가 광저우에 도착했으나 청나라 군이 제대로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자 방향을 바꿔 북쪽 톈진까지 진출을 했고, 도광제는 이를 임칙서의 잘못으로 오판하여 임칙서에 대한 신뢰를 접고 파면한 뒤 북경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대신 기선에게 영국이 요구하는 배상 울 해주고 돌려보내라고 명하고, 기선은 톈진에서 영국군을 맞이하여 조 공물과 은을 전달하면서 비위를 맞춰줬고, 영국군은 톈진에서 퇴각한다. 그러나 영국의 퇴각은 자신들의 뜻을 굽혔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1840년 12월 홍콩의 할양과 아편의 배상금을 다시 요구하기 시작한다.  배상금이야 줄 수 있는 것이지만 영토의 할양은 중국의 자존심상 용납할 수 있는 협상안은 아니었고, 기선은 이를 반대하여 협상이 결렬된다. 그리고 벌어진 해전에서 청나라는 영국에 크게 패했고, 다시 협상의 문이 열리게 되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아 다시 결렬된다.

 그리고 도광제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했고, 전투가 재개된다. 해군력에서의 차이는 육지에서도 똑같았고, 영국군 1만 명은 1841년 8월 청 동남부를 점령하고, 양쯔강으로 진군했으며, 1842년 6월 상하이를 점령 후 7월에는 북경 바로 옆인 난징을 공격한다. 난징의 함락이 가까워지자 청나라는 전쟁 의지를 상실하였고, 결국 난징 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는 문호를 개방하게 되고 영국에 청나라와 독점적인 무역권을 주게 된다.

4. 2차 아편 전쟁과 아편 전쟁의 의의

 1차 아편 전쟁의 이후 영국은 청나라의 개항과 동시에 대청 무역 독점권을 얻었지만 전쟁 승리에 비해 큰 이점과 경제적인 호황을 누리지는 못 하고 있었고, 청나라에 수출은 아편에만 여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유무역으로 인해 청의 차 수입이 더 많아지면서 무역 불균형이 더 심해지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은 이 형세를 뒤집을 만한 트집거리를 찾기 시작한다.

 청 수군이 영국인 선주 소유의 선박인 애로호를 단속하였는데 배 자체는 영국 사람의 소유였지만 애로호에 타고 있던 이들은 청나라 사람이었고, 해적인 게 분명했기에 청나라 수군이 단속을 했지만 영국은 이를 트집 잡아 전쟁을 일으킨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도 자국 선교사가 처형된 것을 구실 삼아 영국과 연합하여 전쟁에 합류하고, 태평천국의 난으로 정국이 어지럽던 청나라는 아무런 방비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됐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이번에는 북경까지 점령하였고, 러시아의 중재로 베이징 조약을 체결하여 홍콩과 접한 구룡반도까지 할양하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는 중재를 빌미로 자신들도 합류한다고 협박하며 연해주를 차지하게 된다. 

 사실 중국 입장에서는 오랑캐들이 침입이 빈번했던 역사인지라 1차 아편 전쟁은 중국인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2차 아편전쟁 때는 자신들의 수도인 베이징이 함락됐고, 자금성에는 영국의 유니언 잭과 프랑스의 삼색기가 휘날리면서 중국인들이 받았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후 중국은 서양의 것을 배우자는 양무운동이 일어났지만 일본처럼 적극적인 방식은 아니었고, 결국 청일 전쟁으로 일본에 패한 후 중국은 자신들의 위치와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의 하락을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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