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항쟁 - 실패한 중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화 시도
제대로 된 중국인은 천안문 항쟁 이후로 다 사라졌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의 천안문 항쟁은 중국이 민주화가 될 수 있는 다시는 안 올 수 있는 기회였다. 아마 이때 중국이 민주화가 됐다면 지금의 좋지 않은 중국 이미지는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미국과 제대로 된 패권경쟁을 하는 존경받는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개혁개방 이후인 1980년대 중국은 급격한 경제와 산업의 성장으로 생산량이 급증했고, 이로인해 천연자원과 생산재 공급이 급감하면서 장기적인 성장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중국은 1984년 이중 가격제를 시행했다. 이중 가격제는 계획된 생산량에 대해서는 계획 가격에 판매를 하고, 계획된 것보다 초과 생산된 물품에 대해선 시장 가격에 판매하는 정책이다.
이런 국가 주도의 생산 정책을 통해 생산량을 조절할 수도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급격한 시장 경제의 충격을 최소화하면서 계획 경제에서 시장경제로 서서히 이행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런 정책 이면을 이용하여 당 간부들의 기업간의 유착 역시 중국 사회에 큰 문제가 됐다. 당 간부들은 물건을 계획 가격으로 싸게 사서, 시장 가격으로 비싸게 매매하는 등의 방식으로 국유 자산을 유실시키고, 시장을 교란시켰다.
공산당은 이런 경제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1987년 10월에 공산당은 가격개혁으로 경제를 개혁한 후 정치개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88년 급진개혁파인 자오쯔양 주도의 가격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개혁제도 발표는 시민들에게 물가 상승에 대한 공포심을 들게 하였고, 시민들은 마트에서 사재기를 하거나 은행에서 인출을 하는 등 사회, 경제 혼란이 가중됐다. 이것은 결국 급격한 물가 상승으로 이어졌고, 이에 공산당은 바로 이 계획을 철회하게 된다.
시민들은 경제개혁이 실패하자, 정치개혁이 물거품이 되고, 과거 마오쩌뚱 시기로 돌아갈까봐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후 각종 시위, 학생운동이 산발적으로 시작된다. 그러던 중 과거 학생과 지식인 보호하려다가 실각했던 후야오방 사망이 1989년 사망하게 됐고, 베이징 시민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여 그에 대한 추모를 시작한다.
이 추모 열기는 기존에 계획했던 정치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발전하여 정치 개혁에 대한 시위, 공산당에 대한 반대 시위로 변질됐고, 이 시위는 경찰들이 과격하게 진압해 버린다. 한술 더 떠 언론은 경찰의 이런 과잉 진압에 대한 내용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이에 시민들은 더욱 분노하게 된다.
시위가 점점 더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자 공산당 보수파 세력은 시위 배후에는 자본주의 세력이 있을 거라 간주하고, 더욱 강력하게 진압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보수파와 반대 입장이었던 자오쯔양은 학생들과 대화를 통해 해결하고 노력했고, 보수파와 리펑 총리는 자오쯔양이 부재한 사이 이 운동을 선동과 폭동으로 정의한 후 동란으로 규정해 버린다.
이에 학생들의 반발은 극으로 치닫게 됐고, 학생 뿐 아니라 노동자, 자영업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는 민주화 운동으로 격상된다. 자오쯔양이 돌아오고 자오쯔양 vs 리펑 구도로 공산당 수뇌부 의견이 격렬하게 갈렸지만, 리펑의 보수파는 자오쯔양이 인심을 얻어 덩샤오핑을 밀어내려고 한다고 모략하여 덩샤오핑의 지지를 얻었고, 자오쯔양의 세력 입지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1989년 5월 15일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천안문 방문이 계획돼 있었는데, 5월 13일 학생들은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 투쟁을 시작한다. 중국 공산당은 고르바초프가 오기 전에 타협을 하려했지만 타협이 결렬되었고, 결국 고르바초프를 천안문이 아닌 공항에서 맞이하게 되면서 공산당의 체면이 구겨졌다.
이에 분노한 공산당은 1989년 5월 19일 계엄령 선포한 후 군대를 보내서 이를 정리하려 했고, 이에 반대하던 자오쯔양은 결국 실각하게 되고,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전차를 포함한 군부대는 천안문으로 계속 진격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시민들은 학생들을 지키려고 하나둘씩 참여하기 시작한다.
6월 2일 저녁 계엄군이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였고, 6월 3일 밤 10시 베이징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발포를 시작한다. 천안문 광장에서는 이 소식을 접한 시위 참여자들은 대부분 도망갔고, 남아있던 시민들은 모두 무참히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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