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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삐 애미의 역사 공부/국사공부

임진왜란의 원인 - 일본의 전국통일과 조선의 붕당정치

by 하삐 애미 2020. 9. 4.

 1585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진출을 꿈꾸고 있었고, 전쟁 시에 항상 대륙 진출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도요토미가 전국을 통일하기 전 일본은 전국에 걸친 여러 영주가 자기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분열된 시대였으나 도요토미가 100여 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일본을 통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분열되어 있던 나라를 무력으로 통일을 한 부작용은 생각보다 컸고, 전국을 안정화시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기존에 자신의 땅에서 왕 노릇을 하던 영주와 무사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그런 불만과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그리고 또 다른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공통된 적과 목표가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대륙 정벌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타깃은 명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조선이었다.

 그는 일본 쓰시마 도주에게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섬기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1588년까지 답을 달라고 하였고 이에 불응시에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하였다. 이것이 어려울 것임을 안 도주는 사절을 보내어 일본 국내의 사정을 설명하고 통신사 파견을 요구하였지만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요토미는 포기하지 않고, 1589년 여름까지 선조를 데리고 오라고 쓰시마 도주를 채근했고. 도주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기가 어렵자 전라도의 유명한 왜구를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해 보겠다고 조선 조정이 조건을 제시하였다.  결국 류성룡 등의 주장으로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 하에 통신사를 파견한다.

 도요토미는 통신사를 무려 4개월이나 뒤에 맞이 했으며, 사절을 맞이하는 예도 갖추지 않은 채로 맞이하면서도 조선의 왕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명을 치는데 선봉을 서라고 하는 등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했었고, 조선 사절단은 이를 거절했다. 

 당시 조선의 상황도 최악이었는데, 붕당정책으로 동인과 선인의 대립이 심하여, 국가의 단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당시 통신사로 왔던 서인 황윤길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 같으니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한 반면 동인인 김성일도 전쟁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느꼈지만 서인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아야 하므로 전쟁준비를 반대하게 된다. 이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의 수군과 육군은 왜구와 해적의 침탈을 막지 못할 정도로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전쟁 물자가 넘쳐나고 전쟁 의지가 넘쳐나는 일본 입장에서 조선 정벌은 누워서 떡먹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또한 자신을 반대하는 반대파를 선봉에 세워 임진왜란이 실패해도 자신의 반대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어 일석이조였기 때문에 절대로 손해 볼 것이 없는 전쟁이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고 1592년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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